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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연예스토리

고현정에겐 없는 엄정화의 특별함

배우 엄정화를 처음 보았던 작품은 최진실, 박중훈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마누라 죽이기’였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신경질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섹시한 배우이자 극의 흐름을 주도하는 박중훈의 내연녀 역을 맡았으나 드라마 속에 극의 긴장감을 더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연기로 보여준 모든 부분에서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당시 기억 속 엄정화라는 여배우는 그랬다. 예쁘게 생긴 큰 눈만 껌뻑거리며 우스꽝스러운 모습만 드러내던 그런 배우였다.

그런데 그랬던 그녀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보게 되었다. KBS 미니시리즈 ‘스타’를 통해 본 그녀는 진짜 배우였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막 전성기를 흘려보낸 여배우로 등장했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이 드라마를 찍을 당시 엄정화는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아이콘이며 상징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녀가 이 역할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번에도 우스운 연기만 보여줄 것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시작된 이후 엄정화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생생했다. 드라마 속에서 자신이 해오던 화장품 광고를 젊은 여배우에게 넘겨주는 장면 속 손가락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리얼함 그 자체를 담고 있었다. 도저히 과거 우습게 여겼던 배우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훌륭했다. 도대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엄정화가 어떻게 이렇게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십 수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도 지금껏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였다.


그러나 지금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에서 열연 중인 엄정화를 보며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벗겨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냥 날 것. 엄정화는 날 것 그 자체다.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캐릭터 그 자체에 동화되어 시청자들에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그녀는 드라마에서 노처녀 혹은 이미 젊은 시절을 흘려보냈지만 그것을 붙들고 싶은 30대 여성 커리어우먼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녀만큼 잘할 수 있는 배우가 없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만드는 수준의 리얼함을 보여준다. 이미지 그 자체로 완벽한 역할을 상징하며 주인공 이름이 아닌 그냥 엄정화라는 이름을 캐릭터로 써도 어울린다 싶을 정도로 싱싱한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엄정화는 나이를 참 잘 먹었다. 다른 여타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의 가치가 처지고 뒷걸음질을 반복하게 되는 현상을 무서워하고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녀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배우로서 더 큰 싱그러움을 뽐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도리어 나이가 날 것을 상징하는 그녀의 이미지에 더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20대 시절, 배반의 장미나 초대와 같은 주영훈의 노래만 부르는 디바의 이미지였을 당시 그녀가 지금처럼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힘든 컨셉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발전하고 있다. 이번 드라마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우스꽝스러운 보정 속옷을 입고, 깔깔대다가도 눈물을 흘리고, 혼자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표현해내고, 혼자 관광버스에 김밥과 음료수를 싸들고 타는, 그런 노처녀 캐릭터를 너무나도 실감나게 표현해내고 있다. 나이를 족쇄가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표현해내며 남자 주인공인 지진희의 모습까지 살리고, 드라마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의 엄정화을 만든 이면에 있는 특별함에는 물론 이미지와 나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로서 그녀가 겪은 산전수전과 절대적인 경험 또한 결코 적은 이유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영화 오로라공주에서 엄정화는 과거 몇몇 작품에서 보여주던 우스꽝스럽고 웃겼던 인위적인 그로테스크를 벗어던진 능수능란함을 보여주었다. 냉정함이 서린 얼굴은 냉혈함 그 자체를 상징했고 표정 하나하나 모두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자연스럽게 쌓은 자신의 이미지와 군대 용어로 표현해 어마어마한 짬밥들을 쌓아가며 자신의 연기력과 이미지와 특별하게 취급될 수 있는 무언가를 완성시킨 것이다.

여러모로 이런 엄정화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선덕여왕의 고현정에게서 짙은 아쉬움을 느낀다. 물론 고현정도 지금껏 선덕여왕 속에서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뛰어나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엄정화가 가진 특별한 이미지나 특별한 경험을 갖추고 보여주진 못하고 있다. 날카롭고 냉혈한 미실의 이미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는 상황임에도 고현정 자신의 예쁜 이미지에 가로막혀 있고, 무언가가 폭발해줘야 할 상황에서 아쉽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해 보인다.

고현정에게 있었던 긴 공백의 시간이 아쉬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녀 스스로는 결혼이 자신의 지금 모습에 도움이 되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결혼과 이혼 그리고 긴 공백의 시간을 거치며 아쉽게도 고현정은 배우로서 더딘 성장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만약에 고현정이 엄정화처럼 자신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변화시키고 진짜 연기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10년의 시간을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선덕여왕 속의 미실은 그리고 고현정은 한 방을 갖춘 특별함을 지닌채 지금보다 더 훌륭한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 고현정이 엄정화가 갖춘 그런 특별함을 만들어나갈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