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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연예스토리

자명고, 거짓말에 발목잡힌 사극

사극이라는 장르는 대한민국에 드라마 산업이 존재하는 이상 영원토록 지속될 장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만큼 기본적으로 흥행능력을 보장해주는 장르이며, 잘 되는 대하사극은 수십회동안 지속되며 엄청난 시청률과 인기까지 가져간다. 또한 상대적으로 지지층과 마니아들이 탄탄하기에 실패에 대한 부담이 적은 장르이기도 하다.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사극에서 이미 그려졌음에도 장희빈처럼 4-5번이나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제작되었을만큼, 방송국에서는 사극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가히 대단하다. 

그런데 가끔씩은 이렇게 사극이 끝임없이 제작되며 또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현상들을 지켜보고있노라면,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극이란 이미 흘러간 실존했던 역사를 현대에 살아가는 이들이 재구성하는 장르이기에, 어떻게보면 너무 쉬운 예측이 가능한 따분한 영상매체이기 때문이다. 즉 사극의 주시청자들은 과거 있었던 역사를 알고 있기에 드라마가 어떻게 끝을 맞이하게 될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시청자들은 주몽의 동명성왕(주몽)이 결국 고구려를 세우게 될 것임을, 중전의 자리에 올랐던 장희빈이 종국에는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게 될 것임을, 또한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천추태후가 결국 황궁에서 아들의 손에 의해 쫓겨나게 될 것을 모두 알고 있다. 이미 드라마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훤히 꿰뚫고 있음에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감상하고 열광적인 반응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영화로 치면 관객이 XX가 유령인 것을 알고 식스센스를 관람하는 꼴이고, XX가 범인임을 알고 유주얼 서스펙트를 관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어떻게보면 참 재미있고 우스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시청자들은 사극에 열광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사극 대작들 중 히트작들은, 모두 과거의 역사를 현실의 삶과 대입시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주몽은 주연배우 송일국이 연말 시상식장에서 "동북공정을 일으키며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중국의 역사적 침공에 반대한다." 고 직접 공개적으로 밝혔을만큼, 지극히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한민족 의식고취를 노린 작품이었다. 대장금 또한 조선시대 궁궐이라는 남성적이고 마초적인 힘을 상징하던 공간을 뒤엎으며, 왕의 수청을 거부할만큼의 당당함과 실력을 갖춘 과거에 살지만 가장 현대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의 이야기였다.

결국 시청자들이 모든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극을 시청하고 있는 이유는, 드라마 안에서 피어나는 사건을 풀어나가는 갈등의 해결방법이 얼마나 현실적인 부분과 맞닿아 자신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지 궁금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이 날리는 포탄에 맞아 가라앉는 왜척들을 바라보며 정기 한일전에서 홈런을 때리는 이승엽이나 골을 넣고 환호하는 박지성을 보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과 맞닿아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SBS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대작 사극 자명고가 극도의 어려움을 겪으며 침몰하고 있는 이유로 여러 이야기들이 제시되고 있다. 일단 단편적으로 제시된 이유들을 들어보면 주연들의 면면이 약하고, 스토리가 엉망이고, 심지어 중견 배우들까지 사극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부분들이 지적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평가들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직 이와 같은 이유들만이 자명고가 몰락하고 있는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보다 자명고가 대중의 외면을 받는 진짜 이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고 그저 에피소드와 사건 위주의 정치극만 보여주고 진부한 삼각관계 그리고 사랑놀음의 밑바탕만을 깔고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보여주며 현실적인 삶을 비추어주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원동력을 찾아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고, 그저 수박 겉만 찝찝하게 핥다가 끝내버리니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극이 가지고 있는 극도의 사실왜곡과 거짓말 또한 대중들이 자명고를 외면하는 이유다. 대중들은 늘 극적인 이야기들을 원하고 그런 극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새로운 것들이 발견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 극적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사극의 전면적인 왜곡이나 거짓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명고는 일단 시작부터 대단히 무리수를 둔 사극이었다. 북을 사람으로 그것도 공주로 탈바꿈시켜놓았고, 그녀를 실화 속의 낙랑공주 호동왕자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드라마의 축으로 설정해놓았다. 거기에 극의 또 다른 주인공인 낙랑공주는 가상의 캐릭터인 자명공주 덕분에 악녀가 되고 말았다. 이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와 역사적인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는 시청자들로서는 머리만 긁적거릴 수밖에 없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인 것이다.

자명고는 그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들로 드라마 내용들이 전부 채워진 상태다. 대표적으로 초반부 최리(홍요섭)가 자신의 두 딸을 죽이는 것을 결심하는 부분과 왕자실(이미숙)이 딸을 살리기 위해 계략을 꾸미며 자신의 몸을 파는 장면. 거기에 대무신왕이 어린 아들에게 벌써 정치적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은 드라마 스토리를 위한 최소한의 거짓이 아닌 역사 전체를 거짓으로 덧칠해놓은 명백한 역사왜곡이었다. 거기에 사극이라는 장르적 쾌감을 확충시키기 위한 거짓말들이 전무하고, 쓸데없는 삼각관계만을 위한 설정만이 난무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시청자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다. 정통 사극을 원하는 시청자층은 생소하고 매력없는 이야기에 지쳐가고, 빠른 퓨전 사극을 원하는 시청자층은 매력적인 요소가 없는 무거운 거짓말들에 지쳐가는 것이다. 


아직 시작단계에 있지만 자명고는 이토록 시작의 첫 단추를 아주 잘못 꿰찼다. 사극 그것도 판타지형 사극을 표방하고 있었다면, 조금 더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선택의 폭을 넓히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이해도를 구하는 영리한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지나치게 극적인 스토리와 무거운 내용만으로 극을 이끌어갔으며, 이에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 부족해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만한 부분도 없었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지켜보는내내 마치 파티복을 입고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 4회에 방영된 내용 중 어린 호동은 자신은 앞으로 칼을 들지 않는 왕이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그런 호동을 향해 아버지인 대무신왕은 "그 선택은 너나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시대가 결정한다." 라는 말을 남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사는 자명고라는 드라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무리 좋은 극적인 긴장관계를 갖춘 웰메이드 드라마를 완성해냈더라도, 지켜보며 선택하는 사람은 시청자다. 하지만 자명고는 이 시대의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시대가 외면할 수밖에 없는 거짓된 요소들을 너무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