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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연예스토리

돌아온 일지매, 주몽과는 다르다


     



 
과거 사극을 드라마로 옮길때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은 리얼리티였다. 실존인물들의 실존했던 과거의 삶을 그리면서도 이를 재미와 함께 현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포장해내는 각본의 힘과 그 세계를 하나의 판타지 세계로 창조해내는 능력까지. 과거 사극은 이러한 역사책에 적혀있는 가공의 현실과 드라마적인 부분의 중간쯤에 감정의 압침을 꽂고 시청자들을 유혹하는 형식을 취해왔다. 

사극은 어떻게보면 굉장히 독특한 장르다.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은 드라마의 결과를 모두 공유한다. 주몽과 태조 왕건은 방영되던 당시 우리나라 시청자 절반이 지켜본 국민드라마였다. 하지만 시청자들 모두 드라마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알고 있었다. 알다시피 주몽은 그가 고구려를 세우며 드라마가 끝나고, 왕건 또한 자신의 힘으로 고려를 세우고 삼국을 통일하는 시나리오로 드라마가 끝난다. 어떻게보면 굉장히 시시하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런 시시함에 혹하는 재미로 사극을 시청한다. 사극을 볼때 시청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결과가 아니다. 다른 지점 즉 과거를 현실로 옮겨놓는 상상력과 그 리얼리티에 혹한다. 그것이 모두가 속거나 혹은 속아주는 형태로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거 인물이 현대적인 상황에 맞춰 해석되는 부분이 바로 캐릭터다. 사극은 드라마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현대인들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을 혹하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살았던 인물이라도 결국 현대적 캐릭터와 공감할 수 있는 상상력이 더해진 인물이 필요하다. 즉 과거를 현실로 옮겨놓는 허구적인 과정에서 재창조되는 캐릭터야말로 사극을 시청하게되는 재미의 중요요소인것이다.

90년대 후반 방영되었던 사극 캐릭터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고 대단한 열풍을 몰아왔던 인물은 드라마 용의 눈물에 등장하는 정도전이었다. 순전히 역사실록에만 적혀있던 정도전은 대단한 파렴치한이었다. 그는 태조의 부인인 강씨를 꼬셔 본처 자식들간의 우애를 무너뜨리고 태조를 몰아내려고 역모를 꾀하던 반역자였다. 만약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가 충실한 실록 그대로 현실을 드라마에 옮겨왔다면, 정도전은 말 그대로 자신을 죽이려는 이방원 앞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비참하게 자신의 최후를 맞이해야했다. 하지만 용의 눈물은 그러하지 않았다. 이유는 과거에는 반역의 증거나 다름없던 그의 개혁적인 정책과 나라를 바꾸려는 의지가 현대적인 상황에는 옳은 방향으로 들어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현대극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정도전은 새롭게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역사가 그러했듯이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은 죽는다. 하지만 실록에 적힌것과는 달리 대단히 편안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자신을 숙부님이라고 부르며 울부짖은 이방원 앞에서 의연한 형태의 죽음을 맞이한다. 과거에는 역모자라는 평가속에서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던 그가 현대적인 사극에서는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로 재탄생되어 이방원의 배웅을 받으며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돌아온 일지매는 현대적인 사극을 모토로 하고 있다.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에 만화적인 상상력과 만화에서만 가능한 상황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고, 전체적인 진지함을 깔고 있으나 분위기 자체에서 풍겨지는 느낌은 속도감있고 경쾌하다. 쾌도 홍길동의 퓨전적인 느낌이 드라마 전체적으로 가미되어 있기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사극들과 다르지 않은 부분 또한 존재한다. 그것은 앞서 말했던 캐릭터다.

이준기에 이어 정일우까지 연이어 등장하는 일지매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대의 변화가 있었다. 변화된 시대 속에서 새롭게 재해석되는 캐릭터들의 모습에서 일지매는 현대극에 가장 들어맞는 캐릭터였다. 결국 현대적인 사극을 모토로 하고 있지만, 어떻게보면 가장 정형적인 형태를 따르고 있기도하다. 실제 종영된 SBS의 일지매 홈페이지에는 비록 상상이지만 답답한 이 시대를 대입해 뒤엎으려는 한 남자의 생을 관찰한다는 문구가 아직도 기록되어 있다. 돌아온 일지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현실의 필요성이 있었기에 가장 사극에 정형화된 모습을 띠고 있기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1회에서 드러난 일지매는 상당히 유치했다. 갑자기 현대적인 도심 한복판에서 닌자복장을 하고 싸움질을 해댔으며 액션신마저 비현실적이고 과장되어 있었다. 또한 절제되지 않은 모습들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도 눈에 띠었다. 문제가 많았다. 시청자들이 우려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연출자가 보여주려고하는 더 큰 부분. 그가 캐치하려고 하는 팩트는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극현대적인 캐릭터의 창조와 서투른 손장난 없이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연출자가 가지고 있는 정직한 의도다.


아마도 황인뢰 PD가 액션신을 조금 더 멋있는 장면으로 탄생시켜 보여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배우의 곁에 카메라를 붙이고 잘라내고 붙이고 잘라내고 붙이는 과정을 거치는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실례로 카메라가 붙어있다면 현대극 싸움임에도 야인시대의 김두한처럼 모두가 슈퍼맨이되어 하늘을 날아다닐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하지않고 꾸준한 롱테이크로 일지매를 캐치해냈으며, 그 과정을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는 이준기의 일지매에서 표현하고자했던 영웅적인 부분과는 별개로 고우영에 원작에 드러나있는 인간적인 일지매를 그리고, 원작의 해석에 초반 충실한 모습으로 사극이 표현하고자하는 부분과 현대적인 자신의 연출스타일을 스텝을 밟아가며 차용하겠다는 연출자의 뜻이기도하다. 황인뢰 PD는 전작인 궁에서도 판타지적인 세계관과 캐릭터간의 충돌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그 갈등에서 비롯되는 성장으로 드라마를 이끌어왔다. 아직 엉성한 모습을 띤 일지매는 즉 연출자의 의도에서 비롯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는것이다.

아직 드라마는 2회밖에 방영되지 않았다. 그러니 벌써부터 일지매가 망했다. 실패했다. 최악이다. 나레이션이 거슬린다등의 섵부른 판단을 하기에는 이르다. 앞서 말했듯이 아직 돌아온 일지매는 판타지적인 상황에 감정의 압침을 꼽는 과정에 있다. 그리고 자신들이 표현하고자하는 역설적인 부분은 아직 해석되지 않았다. 그 역설에 대중이 환호를 보내며 궁처럼 성공할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며 궁S처럼 실패할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돌아온 일지매는 일반적인 사극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조금 더 다른 방향점을 향해가고 있다. 드라마의 내부에 새겨진 부분들을 해석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지만, 벌써부터 이른 판단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두 돌아온 일지매가 일반적인 사극과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그런 일지매의 모습에서 주몽이나 대조영을 원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돌아온 일지매는 주몽과는 다르다. 그리고 정도전이 그러했듯이 캐릭터를 재창조해 현대적인 색깔을 입히는데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진득한 시선을 갖고 돌아온 일지매를 지켜봐야 할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