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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연예스토리

연예인 누드에 색안경을 벗어던지자

몇 년 전, 대한민국 연예 시장에는 동시다발적으로 여성 연예인들의 누드집 발매 광풍이 불었었다. 촉망받는 배우였으나 재기가 불투명한 사건에 휘말렸던 성현아가 복귀 작품으로 누드집을 선택, 도리어 자신의 연예계 활동 일대기에 대반전을 이룩해낸 이후 생긴 일이었다. 여성 연예인들 사이에서는 제 2의 성현아를 노린 일련의 누드 광풍이 일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누드집을 발매했고, 왕년에 톱스타로 군림했던 스타, 인기가 떨어져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스타, 심지어 한창 주목받는 나이의 젊은 스타까지 누드를 찍었다. 가히 누드 황금시대라는 말이 틀리지 않은 광풍이 풀었다.

그러나 한때는 황금알을 낳는 산업으로 여겨지며 광풍까지 일으켰던 연예인 누드 산업은, 몇 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완전히 대중들의 기억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 것일까. 물론 이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의 분위기에 휩쓸려 성숙하지 못한 판단으로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누드를 찍은, 몇몇 연예인들의 경솔함이 빚은 비극이다. 하지만 오직 이 모든 잘못된 분위기와 비난의 타켓을 누드를 찍은 여자 연예인들에게만 돌릴 수 있을까.


어떤 여자든 불특정 대다수를 상대로 자신의 가슴을 노출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이는 꼭 대한민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이든 미국이든 어느 나라든 모두 같다. 그러나 유독 대한민국 대중들은 연예인들이 보여주는 누드에 대해 평가가 더 인색하고, 누드를 작품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자극적인 포르노그라피로 분류해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연예 산업과 정치 권력의 힘이 여자의 가슴을 오직 남성의 성적인 판타지를 상징하는 기호품으로 몰아세운 역사 때문이었다.

196-70년대 대한민국 사회는 멜로 작품에서의 간접적 키스신도 검열했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연예인에게 계란세례를 퍼붓는 보수적인 사회였다. 그러나 1980년대 군부정권은 자신들의 독재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문화산업을 적극 이용한다. 3S 산업 정책이라는 명제가 붙은 이 정책으로, 한국의 영화 산업은 여러 성적인 표현의 규제가 자유로워졌으나 대신 에로틱한 성적 코드의 노예가 된다. 여전히 경찰은 길을 걷던 사람을 마음대로 붙잡아 머리카락을 잘라버렸고, 시민들은 붙잡혀 삼청교육대라는 곳에 끌려갔으며, 정치적인 영화의 제작은 거부되었음에도, 이 때문에 쌓인 욕구와 불만은 오직 폐쇄적인 공간 안에서 비춰지는 여자 연예인의 젖가슴으로 대변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이 가슴을 보고 국민들에게 불만 섞인 현실을 잊으라는 협상문을 내던졌다. 더불어 누드를 판매하는 이들과 상품이 된 여자 연예인들도 적극적인 방법으로 이에 동조하며 누드를 성적인 코드로 분류해 팔아치우기 바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누드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금까지 왜곡된 상태로 이어진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과거와 역사는 최근까지 있었던 연예인들의 누드 광풍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중들은 여성 연예인들의 누드집을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부산물이자 도구로 여겼고, 팔아치우는 자들 또한 돈에 눈에 멀어 이와 같은 현실에 적극 동조했다.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문이나 서갑숙의 자서전과 엮인 자극적 누드집 파문은 당시 누드를 판매하는 상품권자들이 누드를 인식하는 지적 수준이 얼마나 저능했는지를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껏 잘못되었던 이런 시각을 변화시킬 계기는 없을까. 물론 가장 필요한 것은 누드를 바라보는 대중과 이를 팔아치우는 상품권자들의 인식 변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단 누드를 찍은 연예인들에 대한 색안경을 벗어던지는 일이 꼭 필요하다.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에 이어 상상플러스에 연달아 출연한 룰라의 멤버 김지현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자마자 과거 찍었던 누드에 관한 장난스러운 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녀가 룰라의 멤버로서, 가수로서 이룬 업적이 숱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과 진행자들의 초점은 오직 누드뿐이었다. 누드를 찍어서 어땠느냐. 부끄럽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느냐. 누드라는 행위 자체를 바라보는 잘못된 일방적인 소통과 생각을 대중들에게 그대로 전파시킨 것이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제는 누드라는 장르에 대해 이런 타블로이드식 관점으로의 접근이 아닌, 진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무조건적으로 나쁘거나 장난스러운 관점으로 접근하는 일이 더 없어야만 한다. 네가 누드를 찍었으니까 2류이고 3류다. 이런 방법으로 자행되는 성급한 접근은 독재 권력에 성적인 코드가 이용당하던 시절 통용되던 저급한 마인드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어떤 곳에 살아도 성적인 코드가 없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드 광풍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연예인들은 섹시한 모습으로 찍은 화보집을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다. 판매자와 수요자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상태로 사회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지만, 그런 사회와 구성원들간의 암묵적인 룰은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발전으로 전혀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누드라는 장르가 옳은 것이며 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 판매자의 잘못도 있고, 근시안적인 판단으로 성적 코드에 쉽게 자신을 판매한 몇몇 여성 연예인들의 잘못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만든 관행과 관습에 휩쓸려 어떤 대상, 특히 누드를 찍은 당사자에게만 비난과 책임을 집중시키고, 여전히 음지에서 모든 것들이 통용되는 이 분위기가 과연 맞는 것일까.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이제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색안경을 벗고 부드럽고 진보적인 시선으로 누드라는 장르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