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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버라이어티

대한늬우스, 코미디를 죽인 정치놀음

매트릭스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한 영화 ‘브이 포 벤테타’를 보면 영화 중간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언론을 통제하고 파시즘으로 대중을 굴복시키고 있는 정부 지도자 아담 셔틀러(존 허트)가 극중 개그맨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고든(스테판 프라이)에게 우스꽝스럽게 패러디를 당하는 것이다. 고든의 친구인 주인공 이비(나탈리 포트만)는 그에게 보복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으며 독재자인 셔틀러 의장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고든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개그맨이고 토크쇼 진행자야. 이런 시대에 침묵이야말로 진짜 죄악인거지.”

개콘의 인기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대화가 필요해를 패러디해 내놓은 정부의 4대강 살리기 홍보 CF인 2009년판 대한늬우스 때문에 인터넷이 시끌시끌하다. 광고의 내용에 분노한 몇몇 이들이 개콘 시청 거부 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내놓고 있고, CF에 출연한 장동민, 김대희도 맹비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스케쥴 문제로 - 혹은 다른 이유로 - 광고에 출연하지 않은 신봉선은 옳은 결단을 내렸다고 칭찬받고 있다. 출연 개그맨 곽한구의 벤츠 절도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벌어진 구설수로 굳건한 인기를 누리던 개콘이 최악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셈이다.


이 CF 출연은 어떤 면으로 해석해도 김대희에게도 장동민에게도 또한 개콘에게도 최악의 악수다. 물론 개그맨이나 연예인들이 일반적인 정부 정책 홍보 CF에 출연하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다. 실제 지금 정부가 아닌 전 정부의 정책 CF에 출연한 개그맨이나 연예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문제의 구설수 위에 오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그 때와 같은 시각에 놓고 볼 수 없는 문제다. 이는 전국민적인 찬성과 반대 여론이 부딪히는 쟁점 정책에 관한 문제이고, 정책이 옳은지 그른지도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강행되는 사업의 홍보 광고이기 때문이다. 지난 정부에서 만약 사학법 정책 홍보 CF를 만들고 그 광고에 누군가 출연했다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과연 그 누군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답은 너무나 뻔하다. 김대희와 장동민은 이미지를 소비해 삶을 영위하는 연예인이면서 반대하는 대중들의 규모가 극명하게 눈에 보이는 위험한 곳에 어설프게 발을 올려놓았다. 명백하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게다가 이 광고의 기본적 컨셉인 대한늬우스가 무엇인가. 1960-70년대 한창 대한민국이 독재공화국이었던 시절 국민을 세뇌시키기 위해 방영되어 90년대까지 이어진 일종의 어용방송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컨셉의 광고에 그것도 방송법과 관련한 문제로 한창 시끄러운 지금 시점에 몸을 내던졌다. 김대희와 장동민은 지금의 정부가 일부 인터넷 세대로부터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는지 정말 몰랐을까. 몇몇 이들의 극단적인 목소리나 의견들을 옳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뻔히 이런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았던 곳에 들어서는 것이 그들에게 과연 현명한 결단이었냐는 의문이다.

물론 그들이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판단을 내려 광고에 출연했다면 비난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연예인도 국민이고, 국민이라면 누구나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누군가를 지지할 권리를 가진다. 특정 정당이나 정부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반대 집단의 입장과 여론을 가져와 상대를 인격적으로 비방하는 것보다 더한 치졸한 행동은 없다. 하지만 이번 대한늬우스가 과연 김대희, 장동민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가치관만 들어간 프로그램일까. 정답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그들은 개그콘서트의 특정 프로그램을 패러디해 이용했고, 공영방송 속 자신의 코믹한 이미지를 그대로 끌어와 정치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김명민이 강마에 분장을 하고 나와 사회적인 격론이 이뤄지는 한 가운데에서 특정 정책과 정당의 입장을 옹호하며 반대쪽 정당을 똥덩어리라고 말했다면, 그것이 김명민 개인의 생각이고 발언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익 광고 출연은 이런 이유로 개콘 시청자와 코미디계를 볼모삼은 인질극이자 명백한 배신인 것이다.

그저 씁쓸할 뿐이다. 이 사회에도 그리고 그 이전 사회에서도 코미디가 지니고 있는 가치는 정치만큼이나 경제만큼이나 또 사회만큼이나 - 혹은 그 이상으로 - 매우 견고하고 중요했다. 그런 코미디의 근본은 자유에 있다. 자유롭게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그 순간 진짜 코미디는 빛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대한민국 개그와 코미디에는 그런 것들이 사라진 것 같다. 일례로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시도되었던 대통령 패러디가 없고, 그걸 시도하려는 코미디언의 개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편집당하고 말았다.

과연 이 시대가 웃을 수 있는 시대일까. 그 서늘한 군부 독재 시대에도 최양락은 네로25시로 독재를 어둘러 비판했고, 김형곤은 회장님 회장님을 통해 재벌총수의 모습을 패러디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코미디는 군부 독재 시대보다 더 경직되어 있다. 그리고 개그맨들은 특정 정치권과 기득권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도구이자 확성기가 되어버렸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대한민국 코미디에 자유와 웃음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앞서 말했던 브이 포 벤데타 이야기를 더 이어하면 고든은 죽었다. 독재자인 셔틀러 의장은 자기가 우스꽝스럽게 패러디 된 장면을 지켜보다가 마시던 술병을 손으로 깨부수며 곧장 특공대를 출격시켜 고든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문득 이런 현실이 오직 영화 속의 장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현실 속의 코미디도 이와 마찬가지의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두렵다. 정치놀음이라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며 휘청거리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코미디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