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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연예스토리

장자연의 죽음과 매스컴의 상관성

사실 이 글은 막상 포스팅하겠다고 결정하고도, 글을 쓰고 완성하고 다시 흝어보는 순간까지 막상 올리기가 어려운 글이었다. 여배우가 죽었고, 자살했다는 사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추측의 허용 범위 안에 있는 다른 이야기라면 모를까 죽음이라는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소재를 놓고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는 누군가가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이 고인에 대한 무례이자 실례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민하다가 결국 용기내어 이 글을 포스팅하는 것은, 몇몇 이들이 행하고 있는 추측들이 고인에 대한 무례이자 도를 넘는 악의적 행위들로 느껴진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사람은 사고할 수 있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대다수 인간들은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행동하며 추리하기를 좋아한다. 물론 이와 같은 인간들의 행동들이 조금 더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되었을때는, 흥미로운 사건에 대한 재치있는 이야기거리를 만들거나 혹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건을 파훼하는 일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그런 인간들의 사고가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변질되어가면 끝도 없는 괴기감과 분노만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배우 장자연의 죽음은 이미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세상을 등진 몇몇 스타들에게 대중들이 보여준 전례와 절차를 그대로 밟아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흥미로움보다는 괴기감 그리고 분노와 맞닿아있는 사건이다.


어찌보면 고인의 죽음에 대해 냉정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배우 장자연의 유작이 된 꽃보다 남자와 고인의 죽음은 어떤 상관관계도 가질 수 없다. 고인이 꽃보다 남자와 관련한 내용으로 죽음 직전에 유서를 남겼거나 비공개적으로라도 드라마와 관련된 이야기로 힘들어했다는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낭설에 불과하다는 사실들이 이미 밝혀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몇몇 언론들은 가장 쉬운 방법의 레퍼토리인 익명의 측근이 남긴 제보라는 허상을 통해 그녀의 죽음과 유작이 된 꽃보다 남자를 어떻게든 엮으려 애쓰고 있지만, 바보같은 군상들이 아닌 이상 그들의 얕고 뻔한 노림수에 넘어갈 현명한 개인은 전무하다. 

하지만 유독 기존의 몇몇 언론과 몇몇 대중들은 이 죽음에 어떠한 실체도 없다고 해도 믿지 않으며 반대로 고개만 내젓고 있다. 아니 반대로 되려 그들은 뭔가를 잔뜩 기대하는 눈초리로 그녀의 죽음에서 어떤 것들이 더 나오고 파헤쳐지기만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몇몇 이들은 장자연이라는 한 배우의 죽음에 이런 이상기류를 보이며 그녀의 죽음을 꽃보다 남자와 엮으려 애쓰고 있는 것일까.


2005년도에 장진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는 한 여자와 죽음과 매스컴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는 영화로, 이번 사건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속에서 살해당한 피해자는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죽어있었다. 즉 이 영화는 결과를 보여주고 그 과정은 일단 생략한채로 등장인물들에게 자신들만의 해석이 필요한 상황을 내던진다. 여자가 죽은 원인을 조사하고 있는 검사 차승원은 그녀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왜'라는 명제에 집착한다. 그에게 있어서 여자가 죽음을 맞이한 상황은 명백한 이유를 가진 보복을 위해 치밀하게 꾸며진 원한극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를 찾는 것이 필수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검사가 도대체 '왜' 그녀가 죽었는지를 따지고 있을때, 생중계로 방영되는 매스컴들은 그녀를 죽게 만든 원인과 그녀를 죽인 살인범을 자기 나름대로 분석하고 해석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이런 언론들의 독촉과 추측들에 검사는 등 떠밀리는 압박감을 느끼며 점점 궁지에 몰려간다. 그는 점점 초조해하며 불안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고, 이에 결국 그는 용의자로 지목된 그녀의 동생을 심문하면서 논리적이고 타당한 방법이 아닌 감성적인 방법으로 사건의 해결 접근을 시도한다. 몇몇 의구심은 있지만, 그녀의 동생이 범인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임에도 용의자를 심문하고 협박함으로서, 그녀가 목숨을 잃은 이유를 캐내기 위해 집착하고 자신의 논리에 '왜'라는 명제를 적용시켜 사건을 재구성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이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건, 이와 같은 검사의 태도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검사는 이미 일어난 사건의 결과가 아닌 그 과정에 집착하면서 진정한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를 자기 임의대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가 가졌던 마음가짐이나 심리적인 내면의 고통은 모두 무시당하고, 매스컴의 요구대로 짜맞춰진 이야기속에서 그녀를 끝없는 화제의 대상으로만 격하시키는 것이다. 결국 그 와중에 그녀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과 그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진정한 고통은 도외시된다. 살아있는 인간들이 짜맞춘 추리와 시나리오대로만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검사는 수사 중간 이미 세상을 떠난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기회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녀의 살인사건을 수사한다는 검사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그녀가 누군지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녀의 죽음을 밝히겠다고 나선 검사가 얼마나 그녀라는 인간 본연을 무시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장자연의 죽음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그녀의 명복을 밀고 싶다면, 더 이상 어떤 형태로든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장자연이라는 여성을 화제의 대상으로 격하시켜서는 안된다. 현실속 대중과 매스컴은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의 대중 그리고 매스컴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은 끝임없이 장자연이라는 배우가 죽은 이유를 찾아내라고 소리지르며, 마치 자신들이 진실을 밝혀내려는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를 짜맞추는 행동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와중에 그녀가 죽어가면서 느낀 고통과 진심은 무시되고, 꽃보다 남자에 대한 가십과 추측성 기사들만이 남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그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서는, 더 이상은 배후론이니 음모론이니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펼쳐나가며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이유'에 집착하는 이들이 모두 사라져야만 한다. 사람들은 늘 '왜'라는 명제를 궁금해한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이유를 제대로 알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깊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은 이유가 아닌 안타까운 결과다. 아직 자신이 가진 것들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명복을 조용히 빌어주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더 이상은 없는 이유까지 만들어내며 그녀의 삶을 지금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