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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라의 라이프스타일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준 커피 한잔


      




<커피 이야기에 보내는 글입니다>

군대라는 생소한 공간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때 제가 느꼈던 감정은 군인이 되어 자랑스럽다거나 남자가 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사실 두려움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추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강원도만은 가서는 안된다던 주위 선배들의 권유에 적어도 강원도는 안가겠지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던 논산 훈련소에서, 퇴소하는 날 저는 강원도 부대로 향하는 열차에 올라타야만 했습니다. 죽음보다 더한 공포와 두려움이 휘몰아쳤지만 가야만했고, 생소하고 낯선 공간 그것도 너무나 싫었던 강원도의 부대가 앞으로 내 삶의 2년 2개월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까지. 너무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추운 겨울날 앞으로 2년 2개월을 지내게 될 부대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제가 부대에 들어가는 그 날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부대원 모두가 나와 제설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빨갛게 변한 손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눈을 치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짐가방을 가득 어깨에 메고 그들 사이를 지나가며 저는 그들 모두가 저를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나를 죽이기 위해 서 있는 사신들처럼 보였고, 죽음보다 더한 공포가 이제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에 추위만큼이나 더한 한기와 두려움이 가슴 한편을 파고들었습니다.


대대장 및 중대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내무실에 각을 잡고 앉아있는데 이내 제설작업을 마친 앞으로는 고참이 될 부대원들이 내무반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몸과 마음 모두 긴장과 두려움을 가득 담고 일어나 큰 목소리로 저를 소개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안에 들어선 부대원 모두가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고 있는데 입도 떼어지지 않았고, 다리는 계속 후들거려오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란 부대원들이 뛰어오는 장면을 바라보는 것이 제 눈에 보인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눈을 떠보니 의무실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고참들이 서 있었습니다. 훈련소 기간동안 축적된 피로와 부대로 오기 직전에 걸린 가벼운 감기와 고열증상 그리고 긴장이 겹치면서 잠깐동안의 탈진을 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이내 모자에 네 개의 줄을 달고 있던 고참이 입을 떼었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누워있어. 긴장할 필요 없으니까.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더라."

그리고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옆에 서 있던 두 개의 줄을 달고 있던 이가 제게 머그컵 잔 하나를 건네었습니다. 컵 안을 바라보니 약간 식어 있었지만 아직도 따뜻한 온기를 담고 있는 여러가지 형형색깔을 띤 처음 보는 커피 한 잔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거 정상병이 직접 만든거야. 밖에서 바리스타였거든. 감기에는 유자차가 좋다는데 유자는 없고, CP병인 얘가 대대장님 드리려고 커피 만드는데 하나 더 만들어서 가져왔다. 마셔봐."

사회에 있을때 저는 그닥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에 만나던 여자친구가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해도 왜 그런 쓸데없는 커피따위에 돈을 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했습니다. 쓰기만하고 맛도 느낄 수 없으며 돈 많은 고급 입맛을 가진 사람이나 즐긴다고 생각하던 커피였는데, 머그컵 안에 든 형형색깔을 가진 그 음료가 제 혀끝에 닿는 순간 저는 감동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맛이 어때?"
"너무 맛있습니다."

커피맛에 취해버려 홀짝홀짝대며 계속 음료에 혀를 가져다대는 제 모습을 지켜보며 부대원들은 이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한 커피향과 맛에 취해 부대원들이 터트리는 웃음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커피가 맛있을 수 있구나. 긴장감과 얼어붙은 마음마저 서서히 녹아들어가는 것이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벌써 수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그 날 그 기억과 커피맛은 제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커피 한 잔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후에 저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부대원들과 고참들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느끼고 보통 사람들끼리 사는 방법처럼 그곳에서 빠른 적응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커피의 매력에 빠져 사회에서 바리스타를 하고 왔다던 정상병을 꼬셔서 커피 만드는 방법이나 배워나가자는 생각에 한날 조르다가 대대장이 마시는 머그잔을 깨뜨리고 크게 혼이 난 기억도 납니다.

모든 추억은 사람의 기억 속 한 편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빛이 납니다. 이렇게 커피에 관련한 추억이 있어서 커피 이야기에 응모할 수 있는 것도 기쁘고, 잊고 있었던 추억을 글로 남길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주신 블로그뉴스 운영자분들께도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네요.

지금은 하루에 몇 잔씩 즐겨 마시게 된 커피를 홀짝거리며 이 추억을 아름답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추억이 사람에 대한 그리고 사람을 위한 추억이기 때문일겁니다. 짐 자무시의 영화 '커피와 담배'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그 사물에 대한 기억이 아닌 내면에 담겨져 있는 사람에 대한 추억. 커피는 제게 그런 추억을 안겨준 음료이자 제 친구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커피를 마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커피에서 나오는 은은한 향기만큼이나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공유해 나갈 것입니다.